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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보]

중세시대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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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로 유명했던 프랑스의 성군 루이 9세 (St. Louis IX, 1214-1270)

 

그의 치세동안 대대적인 사법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우선 관습법보다 로마법의 원칙을 도입하여 프랑스의 법체계를 더 체계적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대법령"(Grande ordonnance)을 발표했다.

 



그는 파리에 고등법원(Parlement de Paris)을 설치하여 계급 상관없이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게 하며 동시에 국왕의 사법 권한을 확대하였고, 이전 판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등법원에서 항소하여 사건을 재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미신적인 행위로 피고인이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결투재판이나 물에 가라앉히기 등 시죄법을 금지하였으며 고문을 통한 자백 또한 제한하였다.

 

특히 근거 없이는 고발도 없다는, 증인들의 맹세와 배심원단의 철저한 교차검증을 통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지방 영주들의 사법권을 통제하고 왕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왕실 관리들을 파견했고, 이를 통해 지방에서의 부당한 판결과 권력 남용을 줄이려고 했다.

 

루이 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떡갈나무 아래 앉아 신분에 상관 없이 청원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의 전기 작가 장 드 주앵빌(Jean de Joinville) 같은 연대기 작가들은 루이 왕이 증거가 불확실한 경우 처벌을 거부한 사례를 기록했는데, 예를 들어 도둑질로 고발된 사람을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용서한 경우가 있었다.

 



루이 9세가 내린 유명한 판결이 있는데 플랑드르의 앙게랑 드 쿠시(Enguerrand IV de Coucy)라는 꽤 높은 신분의 영주가 자기 영지에서 토끼를 밀렵했다는 죄로 제대로 된 판결 없이 청소년 세 명을 다짜고짜 교수형에 처했다.

 

인근 수도원장과 유족들의 탄원을 받아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왕은 영주를 잡아 가뒀는데 같은 귀족들에게 판결을 받게 해달라, 결투재판을 시켜달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똑같이 일반 재판정에서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게 하였다.

 

욍은 철저한 조사 끝에 등 영주의 증언에 거짓말이 섞여 있으며, 영주를 똑같이 교수형에 처하는 대신 엄청난 벌금과 함께 죽은 청소년들을 기리는 예배당을 세우라는 판결을 내렸다.

 

(벌금은 백성들을 위한 병원 건설, 교회와 수도원 건설, 십자군 지원금 등으로 잘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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