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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보]

우리나라 성벽 높이에 대한 몇 가지 쏠쏠한 정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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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양성의 본래 높이는 40척이었다.

 

우리나라가 사용한 척도는 삼국 시대에 고려척(고구려의 척도)에서 통일신라 시대에 당척(당나라의 척도), 고려 시대의 송척(송, 원나라의 척도), 조선 시대의 도량형이 있는데, 성벽의 높이를 잴 때 어느 것을 사용했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조선 시대의 주척이냐, 조선 시대의 영조척이냐, 아니면 고려 시대의 송척이냐에 따라서 한양성의 높이가 달라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벽의 높이에 영조척을 사용한 것으로 연구가 된 것 같고, 조선이 건국한 직후라면 송척을 사용했을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30cm 정도다.

 

이걸 기준으로 하면 처음 축성되었을 때 한양성의 높이는 12m가 되므로 중국의 베이징성, 시안성과 같은 높이다. 

 

 

 


- 누각의 크기(저 누각 높이가 30m에 육박한다)와 성벽의 폭(18m)을 제외하고 성벽의 높이만 따진다면 조선 초기 한양성곽은 위 사진 속 시안성과 비슷한 높이의 12m였다.


 

2. 지금의 한양성 사대문 성벽은 조선 말기의 것이다.

 

처음 한양성이 만들어졌을 때는 판축 토성과 막돌, 깬돌 석성이 섞여 있는 형태였다. 판축 토성은 말 그대로 흙을 다져서 쌓은 성을 의미하고, 막돌, 깬돌은 자연석 혹은 사이즈에 맞게 부순 돌을 쌓는 방식이다. 한양성이 엄청난 속도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방식 덕분일 것이다.

 

한양성은 도성인 만큼 꾸준히 보강과 재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세종대에는 돌을 가공해서 하단에는 큰돌을 쌓고 상단에는 작은 돌을 쌓는 식으로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중기에는 남한산성의 일부 구간이 그런 것처럼 고구려의 성돌과 흡사한 옥수수알 형태의 성돌이 이용되었고, 우리가 조선 시대의 성돌하면 쉽게 떠올리는 엄청 거대한 장방형, 정방형 성돌은 조선 후기에서 조선 말기의 것이다. 특히 성돌이 가장 크고 성돌 사이에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것들은 조선 말기의 것으로 파악된다. 즉, 현재 사대문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성돌의 성벽은 대체로 조선 말기, 빠르게 잡아도 조선 후기의 것이다.

 

아마 이렇게 축조 방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성벽이 낮아진 것 같다.

 

 

 




- 거대한 정방형, 장방형 성돌을 쓰는 부분은 조선 후기의 축성법이다. 한양성도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반복했다는 증거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3. 신라도 본래 토성과 평지성이 많았다.

 

고운 흙이 많고 평지가 많은 백제만 토성과 평지성이 많았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신라 역시도 토성과 평지성이 많았던 걸로 추정된다. 신라가 처음 자리잡은 자리가 거대한 경주 분지였던 것을 비롯해 의외로 삼국 시대 중기까지 신라의 핵심지들은 꽤 넓은 평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성과 평지성이 발달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신라의 성이 산성 중심, 석성 중심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고구려의 제후국 시절에 고구려의 축성 문화가 흘러들어간 결과로 보인다. 신라가 돌로 만든 산성이 10~16m씩 되는 거대한 성벽을 자랑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신라가 그런 성을 만들기 시작한 건 5세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 신라의 토성 중 최근 발굴 조사 중인 이성산성. 너비가 15m나 되는 장대한 성벽을 자랑한다.

 

 

4. 진주성은 본래 10m에 달하는 성이었다.

 

고려 시대 말기부터 일본이 40년 동안 쳐들어온 규모를 보면 다 합쳐 수천 척의 함선과 10만이 넘는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려의 북방부터 남방까지 모조리 훑었고, 내륙 지방까지 전부 쓸고 다니면서 고려인의 시체로 산과 들을 가득 채웠는데, 이때 고려 조정은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 몽골의 침략 때만 해도 학자들이 추정이라도 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일본의 침략은 그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 번에 모여서 쳐들어온 규모는 일반적으로 수천 명, 아주 드물게 만 명 단위로 결집해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고려의 각 지방은 빠르게 토성을 쌓아서 중앙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진주성(촉석성) 역시 처음엔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토성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쌓은 토성들을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석성으로 개축하게 되고, 이중에 상당수가 읍성의 원형일 거라고 추정하곤 한다. 진주성은 우왕 때 석성으로 증축하는데, 이때는 산에 위치했고 높이가 10m에 달했다. 그러던 성을 조선 시대에 외성을 쌓고 읍성으로 활용하며 높이가 3~6m까지 낮아지게 된다. 

 

성벽의 높이가 낮아진 이유에 대해서 뇌피셜을 돌려보자면 그때 너무 많은 성을 개축해서가 아닐까 한다. 조선 초기에 사방에 만들어져 있던 성을 읍성으로 바꾸는 작업이 짧은 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고, 한꺼번에 작업하다 보니까 돌과 자금이 부족해 기존에 있던 성벽의 성돌을 가져다가 외성을 쌓은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 아무리 돌이 많고 채석장이 많아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다.  

 

 

 


- 고려 말기의 진주성은 지금의 약 2배 높이였다.

 

 

5. 인조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인조는 중국의 성벽이 높은 것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으아니 저짝 중국애들 성은 10길(30m)씩 된다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냐."

 

그러자 이성구가 이렇게 대답한다.

 

"걔넨 평지에 쌓으니까 그래요."

 

둘 다 틀렸다는 점에서 참 기가 막힌 대화다. 당대 중국의 성 중에서 30m가 넘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고대 고구려의 요동성이 성가퀴를 포함해서 10길이었다는 기록은 있다. 그리고 중국의 성은 평지에 쌓아서 높은 게 아니라 수십만 명의 장정을 동원해 수십 년에 걸쳐서 쌓으니까 높은 거다. 

 

중국의 시안(장안)성은 무너진 부분을 1980년대부터 현대 장비와 현대 콘크리트 공법을 이용해 복원했는 데도 20년이 걸렸다. 그런 성을 전근대에 쌓았으니 얼마나 사람을 갈아넣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 베이징성의 성벽도 12m 정도다. 인조는 아마 명나라와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의 성은 다 30m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당연히 사신들이 뻥친 거다.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들의 연행록이나 문집을 보면 만리장성조차 높이가 10길이나 된다고 적어놨으니 말 다했다. 실제 만리장성의 높이는 대개 4~7m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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